”이 도시에 흐르는 피는 모두 내 것이니, 이를 흘리거나 흘리게 하는 자들에겐 저주가 내리리라.”

무덤 도시, 드레’굴의 입구에 적힌 문구에서 발췌.

“검게 그을린 성벽, 까마귀에 뒤덮인 시체가 걸린 교수대, 성읍의 입구 곳곳에 박힌 소름 끼치는 말뚝들과 거꾸로 매달린 해골들. 이 도시의 백성들은 누구에게나 적대적이며, 손에 피를 묻히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방인은 미지의 공포, 죽음을 퍼트리러 온 역병과 같다.”

저 무시무시한 광경은 지옥의 입구나 공포 소설 속의 마굴을 묘사하는 문구가 아니다. 이 문장은 실제 역사책에 기록된 가시의 성읍, 드레’굴을 묘사한 글로 블라바츠키 치하의 ‘전성기’에 적힌 문구이다. 저 문구만 봐도 이 나라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 곳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제베트 블라바츠키는 이미 치세 기간 중에 ‘즈메야(용)’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잔인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들려줄 예시는 많다. 하지만 ‘자신의 백성들을 공격한 자경대를 생포해서 말뚝에 묶어놓고 갈증으로 죽을 때까지 성밖에 박아 뒀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이니 괜히 입 아프게 떠들지는 않겠다. 재미있게도 그녀의 잔혹한 성격은 일반적인 스트리가와 달리 자신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자들에게만 나타났다. 이는 아마 먹잇감을 잡은 맹수가 다른 적수들로부터 자신의 사냥감을 지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바로 꼭대기에 적힌 발췌문만 읽어도 그녀가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여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공식적으로 출간된 일대기를 따르자면, 블라바츠키는 대대로 사형수의 처형을 집행해오던 어떤 귀족 가문의 차녀였다고 한다. 그녀 역시 부모의 업을 따라 사형집행에 필요한 검술과 해부학을 공부했으며, 붉은 수확 전쟁 시기엔 자신의 사병 집단을 이끌고 추격기병대 겸 고문 전문가로 참전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그녀는 말을 타고 예리한 곡도로 적들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뽐냈고, 그녀가 이끄는 기병대는 ‘용기병’이란 단어를 창조해낼 정도로 극악무도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의 끝을 볼 수 없었다. 전장에서 맺은 인연인 ‘얼음 심장’ 이반 공작이 그녀에게 청혼했던 것이다. 이반 공작의 구혼을 받아들인 블라바츠키는 그와 함께 붉은 수확 전쟁에서 *물러났고, 반년 뒤에 그녀의 성에서 그와 결혼하였다. (*훗날 이 전쟁이 어떤 몰골로 끝났는지 안다면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하이데’ 문서를 참고해라)

블라바츠키와 이반 공작은 –믿기 힘들겠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들리는 말에 따르자면 둘은 이제껏 한 번도 손에 피를 묻혀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평온하고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만약 모든 게 이대로만 흘러갔다면 그 둘은 흡혈귀가 등장하는 이야기 중 최초로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무엇인가? 행복한 이들에게 절망을, 불행한 이들에겐 나락을 안겨주는 변덕스러운 존재가 아니던가? 이런 인생의 법칙은 블라바츠키 조차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반 공작이 시름시름 앓더니 시커먼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이다. 그날은 블라바츠키가 후세를 가진 것을 남편에게 알려주려 했던 날이었다.

블라바츠키는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써서 그를 치료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병세는 심해졌고, 결국 그는 여공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또한 의문의 열병에 걸려 쓰러졌는데 그 여파로 후세의 목숨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여공의 성격은 변했다. 그녀는 수시로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으면서 ‘우린 모두 병에 걸렸어’라느니, ‘병이 퍼지는 걸 막아야 해’ 등등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블라바츠키는 세금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피를 뽑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는 금지된 의술을 쓴 대가로 고국에서 추방당한 어떤 여의를 등용하여 그녀에게 의수와 새 연구실을 제공해주었고, 그녀에게 피를 정제하는 법을 연구하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자면 그녀는 수시로 자신의 몸에 정제한 피를 주입하곤 했다는데, 그녀가 왜 그런 기행을 저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시 자기 몸에 깃든 스트리가의 피를 완전히 중화시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몸에 생명을 품을 힘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일까?

여공의 이런 광기 어린 행동은 결국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상한 연구가 계속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그녀에게 의심을 품었다. 이반 공작을 죽인 것도 사실은 그녀이고, 그녀의 후세가 죽은 것 또한 전부 고의적인 짓이었다고 말이다. 자신이 마실 피를 자식이 뺏어 먹는 게 아까워서 말이다. 이런 흉흉한 소문이 돌자 그녀의 시종들은 여공의 보물들을 몰래 쥐고 성밖으로 달아났으며, 그녀의 백성들은 집을 버리고 야밤을 틈타 도망쳤다. 그래도 여공을 동정해서 고집스럽게 성안에 남아있던 자들은 여공의 광기에 시달리다 결국 피가 모두 뽑혀 죽었고, 결국 드레’굴은 공작과 후세가 죽은 지 삼 년도 되지 않아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 이후 여공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피를 너무 많이 뽑은 나머지 죽어버렸다, 오염된 피를 너무 많이 주입한 나머지 병에 걸려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결국 이성을 잃고 미쳐버려 밤 중에 사람들을 납치하는 마녀가 되었다, 등등 이런 종류의 이야기라면 심심하지 않게 튀어나오는 무성한 소문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문장들을 굳이 과거형으로 말한 거에서 눈치챘겠지만, 오늘날 우린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역사 속에 마지막으로 고개를 내민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다시금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난 그 날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운명적인 날, 바로 ‘검은 피’가 하늘에서 내렸던 날이었다.

파멸의 법관이자 죽음의 화신인 ‘앙코우’가 그의 충직한 11명의 심복을 거닐고 인간들의 도시에 강림했던 그 날, 놀랍게도 블라바츠키는 그들 중에 서 있었다. 살아있는 검은 피가 미친듯이 꾸물거리는 황금 잔을 손에 들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아름다운 미모를 발하면서 말이다.

앙코우는 탐욕과 오만함에 찌든 인간들에게 유죄를 선포하고 우리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의 기사들은 판결문이 떨어지자마자 황금 잔을 기울고,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앗아갈 끔찍한 오염체인 검은 피를 주저없이 쏟아 부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다른 기사들이 묵묵히 검은 피를 쏟아 부을 때, 블라바츠키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검은 피를 부으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 방법 밖엔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독자들이 저 말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보나마나 광증에 시달리다 내뱉은 헛소리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딱 봐도 저건 마치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12기사(헤이렐, 앙코우 문서 참고.)의 일원이 된 것일까? 그들의 목표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죽어버리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게 대체 뭐가 있냐는 말이다. 그녀가 마시는 피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의 피가 아니던가? 그녀는 정녕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평생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생하려고 저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걸까?

아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다. 그녀를 인간답게 이해해줄 필요도, 동정할 가치도 전혀 없다. 그녀는 그저 인간을 흉내 내고 싶었던 미치광이 흡혈귀에 불가하다. 그러니 그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불사자들과 함께 어둠 속에 묻어두고 영원히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자.

<추신> 역사적 기록에 따르자면 그녀는 미치기 직전 자신의 일족을 찾기 위해 온 지면을 뒤졌다고 한다. 그녀의 일족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전부 창백한 은발을 가졌기 때문에, 마을에서 은발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염색약으로 머리를 감추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 만약 노인이 되기 전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은발인 것을 들키면, 그 아이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드레’굴로 끌려간 뒤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딱 한 명, 어느 소년 한 명만이 불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물론 그 얘기는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의 이야기이니 그 아이는 지금쯤 이미 죽어서 백골이 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만약 그 아이가 불사자들의 가호를 받아 불사자가 되었다면, 그 아이는 지금 바로 우리들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아주 가까이에 말이다.";

“얼굴을 숨긴 채 다정하게 절 부르는 당신은 누구죠? 절 해치러 온 ‘유령’인가요?”

그러자 가면을 쓴 남자가 말했다. “아니, 난 널 구원해주러 온 ‘천사’란다.”

오지 M. 앤디아즈, <무대 위의 유령>에서 발췌.

친애하는 새벽별 교단이여, 그대의 요청에 응하여 불사자의 도시, 엘레오노라에서 이 서신을 전하오. 우리 불사자들은 요 며칠 전, 유랑극단의 가희들로 분장한 여인들이 그대들의 수도 본부에 잠입하여 주요 인사 몇몇을 암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또한 우리는 그 ‘가희’들이 특이한 외모와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이들이 ‘불사자 왕국’에서 온 자객들이 아닐 까라는 소문을 접했고, 이에 대한 의심을 풀고자 교단의 신학자들과 함께 ‘가희 자객들’의 유골을 검사하고, 그 유골에서 찾아낸 모든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맺었소.

친애하는 교단이여, 우리 불사자들은 귀공들이 보낸 정체불명의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소. 그리고 이 사실은, 그대들에게 결코 좋지 않는 것이오.

이들은 겉보기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코 진짜 사람은 아니오. 이들은 겉부터 속까지 철저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소. 전력의 힘으로 뛰는 심장과 사람의 손으로 끓인 가짜 피, 흡혈귀의 재생 능력을 가진 신체와 정체불명의 소재로 만들어진 인공 뼈... 그 어느 것도 섞일 수 없는 것들이, 말도 안 되는 확률에 의해 뭉쳐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오.

우린 여태까지 이런 생명체를 본 적이 없소. 물론 이들과 거의 비슷한 종류의 생명체들을 본 적은 있지만 말이오. 드레’굴에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들과 운드라의 안개 엘프들처럼 말이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기반으로 해서 ‘개량한’ 복제품이었지,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인공적으로 ‘조립한’ 것은 아니었소. 이 ‘생체 인형들’의 창조자는 엄청난 인내력과 집중력을 가진 천재이거나, 엄청난 원망과 집착을 지닌 미치광이인 것이 분명하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는 화약 무기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이건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이오. 우리 불사자 왕국이 소유한 불사제압용 피스톨, ‘세쿤두스’와 비교해본 결과, 이들은 우리들의 무기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장전 속도, 연사력, 그리고 무시무시한 화력을 갖고 있었소. 방아쇠를 한 번 꾹 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십 발의 납탄을 발포하다니, 대체 얼마나 큰 악의를 품고 있어야 한 번 죽을 수 있는 생명체를 수십 번이나 연달아 죽일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오? 이 무기의 설계 도면이 어셔에 퍼지게 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오.

친애하는 교단이여, 우리 불사자들은 그대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소. 그대들은 이미 12 기사들과 검은 피의 권속들과 대치하고 있소. 하지만 최근 들어, 조용히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그대들의 숨통을 조이는 자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소.

우린 그대들이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요. 그대들은 어셔에 살아남은 자들을 수호하는 자들, 어셔에 드리운 끝나지 않은 밤을 밝히는 새벽별이오. 하지만 그 새벽별을 빛내기 위해 세간으로부터 묻어버린 비밀들이, 언젠가 그대들의 숨통을 끊을 비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그대들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적을 만들어 버렸소."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만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자아가 사라져버렸을 영겁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 세계에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절박하지만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를.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그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내 자신을 감싸는 따뜻한 하얀 빛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떴다.

그녀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헤이렐이다. 헤이렐은 시간의 여신 `류드밀라`의 요청을 받아 엘피스 인근을 이 잡듯이 뒤져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태어난 모습 그대로 엘피스의 언덕을 거닐고 있었다. 헤이렐은 그 모습을 보며 명화 속에 그려진 아름다움과 같다고 생각했다. 류드밀라는 헤이렐에게 그녀가 여신 `누우`의 기억의 결정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또한, 시간의 힘은 균형이기에 운명이 원정에 필요한 힘을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말해주었다. 헤이렐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 했기에 이에 관해 물어본 마법사 플린에게서 한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교단에 들어온 이후로 한동안 그녀는 사실상 감금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힘을 사용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였기에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아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가 노려본 것 만으로 교단 내의 시설이 파괴되었고, 죽을 뻔한 사람들도 여럿 생겨났다. 이렇게 모두가 기피했지만 헤이렐 만큼은 달랐다. 자신이 데려오기도 했고, 너무나도 순수해 보이는 그녀를 그냥 놔둘 수 없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친언니처럼 항상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고, 직접 그녀에게 `누아`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헤이렐의 오랜 노력 덕에 누아는 어설프지만, 조금은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어 약간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에 가까운 존재이나, 여신 누우의 힘 일부를 물려받은 존재이므로 인간들에게 있어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준비가 되면 원정대의 일원이 될 것이지만, 아직은 자기 힘의 위험성을 모르며 통제조차 할 수 없기에 현재 누아는 교단의 소속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으며, 그녀를 보호하는 교단 역시 누아를 도우면서도 그녀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항상 감시하며 대비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반드시 적들이 탐내는 법이기에.

”지붕 없는 빛의 성채에서, 우린 모두 자유였네”

멘카우레의 안케세나멘, <스핑크스>에서 발췌.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이 그 유례를 추측해보았지만,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천사들은 도대체 누가 낳은 것일까? 이 인간을 닮은 괴물들을 만든 존재는 대체 누구일까?

그것은 용이었을까, 아니면 새였을까, 아니면 신이었을까, 아니면 요정이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폭풍우로부터 천둥을 짜내 창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어떻게 바람의 깃털을 뽑아 그들의 날개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소리 없는 언어로 부르는 그들의 노랫소리는 대체 누가 작곡한 것인가? 인간과 무서우리만큼 흡사한 그 외모는, 대체 누굴 본 딴 것인가?

그 옛날 인간이 아직 천사들을 몰랐을 시절, 이방의 땅에서 이상한 소문 하나가 떠돌았다. 벼락치는 하늘에서 한 여인이 떨어지는 것을 누군가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번개에 감싸져 있었다는 그 여자는 놀랍게도 몸에서 은은한 빛이 번뜩였다고 하며, 새처럼 날개가 등에 달려있었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생명체가 바로 오성교의 신화에 등장하는 ‘천사’이며, 현재 이 여인의 주검은 사막에 숨어사는 어느 은둔자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인간들의 왕이 살던 도성에 이 기이한 여자와 은둔자에 대한 소문이 전해졌다.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왕성한 호기심을 가졌던 왕은 이 수수께끼 같은 은둔자를 찾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어느 잊혀진 땅에 지어진 작은 오두막에서 말 못하는 벙어리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소문 속 은둔자를 찾아냈다. 왕은 은둔자에게 물었다.

“네가 가진 진귀한 물건을 보러 왔다. 천사의 주검을 가진 것이 사실이냐?”

“그런 거 없소.” 은둔자가 말했다. “있다고 해도 보여줄 생각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오.”

“무례한 지고! 짐은 이 땅의 모든 길들이 향하는 도성의 지배자다! 당장 천사의 주검을 내놔라! 안 그럼 네 목을 치겠다!”

“날 죽인 뒤엔 내 딸에게 물어볼 거요? 썩은 시체 하나 보려고 신선한 시체를 두 구나 만든다니, 참 생산적인 양반이시구려. 이대로 죽어도 별 여한은 없다만, 늙은이로서 한 마디만 하겠소.”

은둔자는 왕이 자기 목을 치기 편하도록 모자를 벗고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엔 가끔 모르고 있는 게 나은 것들이 있소. 누군가 만약 목숨까지 걸면서 막으려는 게 있다면, 그게 단순한 고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좀 해보길 바라오.”

은둔자의 기이한 행동을 본 왕은 결국 천사를 보길 포기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노력이 모두 허사에 불과하단 걸 생각하자, 왕은 분을 참지 못했다. 결국 성난 왕은 사냥꾼 중 하나를 시켜 자길 모욕한 은둔자를 활로 맞춰 죽이라고 명령했다. 사냥꾼은 그 명령을 받고, 하늘로 화살 하나를 쏘아 올렸다. 이윽고 먼 광야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은둔자가 죽자 왕은 겨우 화를 풀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둔자가 살던 광야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아까 전에 들려왔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병사들이 등 뒤를 돌아봤을 때, 그들은 은둔자의 딸이 피에 젖은 날개를 펄럭이며 번쩍이는 창을 든 채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몇 달 후 도성에 돌아왔을 때 왕은 온 몸에 흉터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함께 동반한 수십 명의 병사들은 단 네 명만 남아있었고, 모두 겁에 질린 상태였다. 사냥꾼은 손가락 하나만 돌아왔다.

왕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왕국의 지도에서 은둔자가 살던 곳을 지워버린 후 천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물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왕자들에게 ‘천사’를 두려워하라고 미친듯이 중얼거리다 천둥이 치던 어느 날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다. 그는 죽기 전까지 그가 남긴 진지한 경고가 인간들을 ‘천사’라는 끔찍한 존재들로부터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들이 그만큼 왕성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모든 종족을 통틀어 요정이 가장 괴짜라고들 하지만, 그런 요정 중에서도 괴짜로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스카디가 딱 그런 괴짜 중 하나에 속했다. 요정 대부분이 숲이 드리우는 녹음과 약간의 축축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곳에서 발아하는 생명을 사랑했다면 스카디는 물, 그중에서도 바다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 물 역시 생명을 잉태하니 바다와 숲이 아주 다르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장난을 치는 일에 별 흥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식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장난을 치지 않으니 굳이 마법을 써야 할 일도 없었다. 그녀가 창조한 유일한 마법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그녀의 바다를 향한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한 대목이다.

어쨌든 그녀는 숲의 그늘 대신 심해의 바위 틈새에서 잠이 들었고, 모래를 달구는 뙤약볕 아래에서 날아다녔다. 덕분에 소금기를 머금은 온몸이 빛을 받을 때 반짝거렸는데, 마침 물빛의 머리카락까지 더해져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느 날 달빛이 환한 밤에 아주 잘게 반짝거리는 스카디를 목격한 한 화가가 벽화에 그녀를 그려 넣음으로써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지역 바다의 명물로 통하기도 했다. 칠백일흔일곱 번째 폭풍이 지나갈 무렵엔 요정의 특징이었던 뿔과 날개가 거의 사라져, 그녀의 종족이 무엇인지 대한 열띤 토론이 바다 근처 도시의 안줏감이 되었다. 요정임을 알고 있는 노인, 인어나 엘프일 거라 짐작하는 청년, 해파리를 닮았다고 하는 아이가 모두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카디는 여전히 그 바다에서 유유히 떠다녔다.

스카디의 신비롭고 요정 같지 않은 고요한 분위기 때문인지, 바다에 온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허락한 것은 한 바다 엘프족 한 명이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한 탓에 은근히 배척받던 이였던 탓이다. 말 못하는 이와 어떻게 대화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 당시 엘프는 종족 중 가장 많고 다양한 지식을 받았고, 문맹률이 0%에 달했다. 만약 그 엘프가 어떤 업적을 남겼다면 그중 하나는 요정을 교육한 최초의 엘프였으리라.

하지만 공교롭게도, 엘프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는 데 성공한 스카디가 유일한 친구의 이야기를 모두 듣기도 전에 교류는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는 엘프들만 걸리는 전염병이 창궐해 대륙을 휩쓸던 참이었고, 몸이 약했던 그녀의 친구는 그것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도시와 함께 버려진 병든 엘프들이 고통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릴 때 나타난 것은 스카디였다. 그 참상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친구였던 엘프를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해 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평생을 결함을 지닌 채 살며 배척받은 삶은 스카디라는 친구 하나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최초의 요정, 첫 요정임을 들었던 엘프는 자신을 치료하는 대신 동족이 멸절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첫 친구의 마지막 부탁은 과연 스카디에게도 무시할 수 없었던 무게로 다가왔던지, 한참이나 그를 응시하던 스카디는 아주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서쪽 바다와 그곳에 살던 바다 엘프들은 약자를 배척한 주제에 분에 넘치게도, 스카디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과분한 것이었던지, 엘프들은 스스로 그 행운을 걷어내고야 말았다. 전염병이 잠잠해지나 싶었을 때 발발한 전쟁. 종족을 막론하고 벌어진 전쟁은 기어이 요정에게도 피해를 주었고, 이에 분노한 북쪽 숲의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서쪽 바다에 닿은 뒤 벌어진 일이었다.

스카디는 실로 오랜만에 북쪽 숲에 살던 형제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희는 이 재미 없는 일에 나서지 말아주렴.' 애초에 그럴 예정이었던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땅에서부터 밀려오는 오염된 것들을 걷어내는 중이었다. 시체가 땅과 함께 썩어가자 이를 모두 바다에 버리는 놈들 탓에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친구의 무덤을 조개껍데기나 죽은 산호 등으로 꾸민 후 바다로 돌아가려던 스카디에게 한 무리의 바다 엘프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스카디가 대가 없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고마워, 선물을 준비했다며 아쿠아마린 여러 개가 장식된 티아라를 내밀었다. 그녀는 이를 무시하려 했지만, 하필 그 티아라를 건네던 것이 친구와 무척이나 닮은 어린 엘프였기에 결국 이를 받아 들었다. 이어 착용한 걸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 엘프를 보며, 친구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목소리였을까 생각하며 티아라를 머리에 얹은 스카디는 금방 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자유로웠던 두 발이 가장 먼저 얼어붙자, 그녀는 잊고 있었던 요정으로서의 본능대로 날개를 움직이고자 했으나 이미 녹아 없어진 것이 움직일 리 없었다. 냉기는 빠른 속도로 몸을 잠식해 갔고, 몸을 감싸는 얼음이 자신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스카디는 완전히 빙결이 되어버린 후였다. 몸은커녕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지만 아직 의식만큼은 또렷한 가운데, 그녀의 귀로 자신을 옮기는 바다 엘프들의 대화가 흘러들어왔다.

종족을 막론한 학살이 가능할 정도로 강한 북쪽 숲의 요정처럼, 이 요정 또한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프루덴시아에서 온 엘프 학자 덕분에 빙결된 요정에게서 마나만 빼내어, 우리를 보호하는 데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을 들은 스카디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 느끼는 이 분노는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얼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녀의 생각이 결론에 도달하기 전, 마침내 의식까지 완전히 멈춘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큰 충격에 스카디의 의식이 돌아왔다. 여전히 얼음에 잠식되어 있었지만, 더 이상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는 없었다.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 왜 바다가 아닌 설산이 눈앞에 있는지, 지금 얼음을 부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지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가운데, 두 가지만은 분명했다.

바다로 돌아가리라. ……엘프를 믿지 않으리라.

“이 세상엔 가끔 잊혀져야만 하는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F. 출처 불명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건져진 이 아이는,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모른다.
이 아이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어쩌다 그곳까지 흘러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는 그저 그곳에있었을 뿐이다.
아이는겁에 질려 있다.
아이는 상처투성이이다.

누가 이 아이의몸에 흉터를 남겼는가?
이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니면, 이 아이를 나락에서 억지로 끄집어 올린 우리가?
과연 우리는 이아이를 건져내야만 했을까?
이 아이를 하필 지금, 이 끔찍한시대에 건져낼 필요가 있었을까?

망가진오르골과 굳은 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장난감과 말을 못하는 아이는,
어쩌면 자비로운 망각이 이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지켜주고자
포근한 어둠 속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한 불행은 망각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잊을 수 있기에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낡은 것을 버림으로 새것을 얻을 수 있다.
잃으면 잃을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망각이다.
하지만 우린 무언가를 잊기 위해 무엇을 잃을 지 고민해야한다.
그것이 망각할 수 있는 자들이 겪어야 하는 시험이며,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이다. 설마 그 대가를 치루지 않고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언젠가 그 얻게 된 것을 망각의 대가로 치뤄야 할 때가 오게 될 것이다.

망각은 빚을 지지 않는다.
망각은 매정하다.
망각은 자비롭다.
망각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하지만 망각이 걷어간 대가는 어떻게 되는가?
망각의 손에 넘어간 그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는가?
우리 곁에서 소멸되는가?

아니다,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
비록 우리가 기억하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모든 것들은 결구 망각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바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자, 이 세상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이 세상에 좋은 것일까?
과연 그 귀환은, 모두에게환영 받아도 마땅할 귀환일까?
혹시 이 세상에 돌아오기엔 너무 낡은 것이 아닐까? 너무 진부한 것이 아닐까?

 가끔 사람들은 역사 속에 잊혀져 사라져야 마땅할 것들을 개인적인 이유로 억지로 끌고 오곤 한다.
그리곤 그것이원하든, 원치 않든, 억지로 새것처럼 꾸미고 이 세상에 돌려놓는다.
억지로 돌아온 것을 환영할 자는 아무도 없다. 억지도 꾸며진 것을좋아할 자는 아무도 없다.
결국 돌아온 것은 다시 잊혀지게 된다,

모두가 무시하고,
모두가 경멸하고,
모두가 비웃는 상황 속에서,
비참하고 쓸쓸하게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럼이 아이에게 주어질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오랫동안 혼자였던 이 아이는, 과연 자신을 사랑해줄 새로운 이들을 찾을 수 있게 될까?
아니면, 모두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다시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게 될까?

 …근데잠깐, 그걸 왜 우리가 판단하지? 왜 우리가 이 애의 미래를멋대로 예상하고 있는 거지?